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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지 못한 귀국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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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일본 군함 우키시마호. 

해방 이후 한국인을 태운 귀국선 1호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패망하고 한국은 독립을 맞이했다. 당시 일본으로 강제징용된 한국인 200만명은 조국의 광복으로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푼 꿈을 가졌다. 하지만 일본 헌병대는 징용된 한국인들의 폭동을 우려해 경비를 강화했고 그들의 통행을 차단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예상과는 다르게 한국인들은 떡을 만들고 인근 주민들과 나누며 종전을 축하했다.

 

 

돌아간다 조국으로! 

1만명의 한국인을 태우고 부산을 향해 오미나토항에서 출항하는 우키시마호.

 

 

그러나 갑자기 예정 항로를 벗어난 귀국선 1호.

 

일본 해군 특설함 우키시마호는 1945년 8월 22일,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한국인들을 배에 태운다. 당시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군은 이 배가 조선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기회다라며 탑승을 재촉했다고 한다. 그렇게 한국인과 그들의 가족 등 1만명을 싣고 부산항을 향해 출항한 우키시마호는 항해 이튿날인 24일, 갑자기 예정 항로를 바꿔 교토시 마이즈루항 근해에 들어선다. 

 

 

예정에 없었던 마이즈루항 근해에 도착하자 230명의 일본군 승조원들이 하선했다.

 

배에 탑승했던 일본군 승조원은 255명. 한국으로 돌아가면 한국인들에게 보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명목과 구실로 구명보트를 이용해 230명의 일본군들이 도중에 하선한다. 

 

생존자인 채길영씨의 증언에 따르면 우키시마호가 마이즈루항 근해에 다다르자, 일본군들이 한국인들은 선창으로 내려가도록 지시했고 수 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채 배밑으로 들어가야만 했다고 한다. 갓난아기를 안은 여성부터 탄광의 부상자까지 한국인들은 일본군의 명령에 따라 선창으로 모였다. 

 

그리고 일본인 승조원들이 모두 소함을 타고 배를 빠져나가자 그 뒤로 세번의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우키시마호는 갑작스런 폭침으로 침몰하기 시작한다.

 

 

 

침몰 중인 한국인 귀국선 1호.

 

일본 정부는 즉각적으로 미군이 부설한 기뢰에 의한 폭침이라며 사건을 발표하고 의혹을 일축시켰다. 그리고 생존자 1500명, 사망자는 한국인 524명, 기관실에 남아있던 일본인 승조원 25명으로 축소발표했다. 

 

하지만 당시 생존자의 증언과 탑승을 관리했던 오미나토항 관리자는 4500명이 정원인 우키시마호에 한국인들을 최대한 많이 탑승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당시 정원 2배가 넘는 1만여명의 한국인을 승선시켰다고 말했다. 당시 한국인들이 우키시마호에 탑승하기까지 나흘이나 걸렸으며 배는 발을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찼었다. 

 

연합군은 우키시마호의 출항을 금지하는 긴급 전보를 보냈지만 관할 지역의 일본군 사령관은 이를 알고도 연합군의 전보를 무시한 채 우키시마호를 강제 출항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그렇게 8천여명의 한국인들은 고국의 땅을 밟지도 못한 채 일본의 차가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폭침 이후 일본은 같은 해인 1945년에 선체를 인양하려고 했으나 선체가 너무 무거워 인양할 수 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1954년, 유가족들이 항의와 진상규명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이 모두를 묵살한 채 민간기업에게 권한을 넘기고 배를 인양하였다. 당시 기록에 보면 배 바닥에는 비정상적으로 많은 360톤의 자갈이 깔려있었으며 두동강난 선체는 안에서 바깥으로 휘어져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 기업은 추가조사없이 우키시마호 선체를 해체하여 모두 고철로 매각해버림으로서 일본 정부의 폭침 증거와 만행은 영원한 미제사건으로 남게 된다.

 

그리고 35년이 지난 1980년, 잠수부 가사하라씨는 사건 현장인 마이스루만 바다 밑을 조사하던 중 유골 무더기를 발견하였다고 알렸다. 

 

이제야 고향 땅에 돌아갈 수 있다는 기쁨을 안고 귀국선에 올랐던 한국인들. 강제징용으로 끌려와 일본인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핍박을 받았어도 그분들은 떠나기 전까지 일본인들에게 정을 베풀었던 사람들이었다. 나라를 잃었던 서러움과 아픔을 잊고 광복이란 기쁨의 눈물로 귀국선에 올랐지만, 마지막까지 일본인들의 말을 따라야만 했던 수천명의 한국인들은 그렇게 꿈에 바라던 해방된 조국의 땅을 밟지도 못한 채 일본의 차가운 바다 속에서 잠들어버렸다. 

 

 

우리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이 가슴 아픈 역사를 절대로 잊지 맙시다. 

 

 

 

 

패망 후 일본은 모든 증거 자료와 문서, 명단을 파기하고 불태웠다. 

전쟁 범죄와 강제징용, 징병, 학살에 따른 배상금 문제까지 내다보고 철저하게 계획한 것이다. 

당연히 전쟁 배상금에서 증인이 될만한 당사자들이 순순히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그들은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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